화성시, 옛 남양부(南陽府) 관아(官衙)의 마지막 유물 기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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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옛 남양부(南陽府) 관아(官衙)의 마지막 유물 기증.
  • 윤민석 기자
  • 승인 2011.11.2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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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옛 남양부(南陽府) 관아(官衙)의 마지막 유물 기증.ⓒ경기타임스

골목이 넓어지면서 느티나무 홰나무들 박힌 고을 관아가 멀리 보인다. 남양에는 원래 성지(城池)가 없다. 큰 고을에는 으레 성이 있고 못[池]이 있게 마련이나 남양만은 고을을 둘러 싼 성곽도 없고 사대문도 없는 것이다. 동헌(東軒)이 있는 관아도 역시 그 주위에 담이 없고 홰나무, 느티나무 따위의 큰 나무들이 담 대신으로 심겨져 있다. 관아의 남쪽으로 ‘와룡루(臥龍樓)’라는 누문(樓門)이 하나 있어 이것이 남양 관아의 삼문(三門) 구실을 할 뿐이다.

- 남양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 『먼동』 중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된 소설 『먼동』에도 등장하는 남양부 관아 남문의 누각(樓閣) 와룡루(臥龍樓)에 걸려 있던 현판이 화성시에 기증되었다.

< 풍화당기로회에 걸려 있는 와룡루 현판 >

삼국시대 중국과의 교통로 역할을 했던 당성 시기부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원부에 통합되기 전까지 남양부는 천오백여년 동안 독립적으로 운영된 행정기관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부에 정3품 당상관이 부사(府使)로 임명되어 현재의 남양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했던 관아에서 집무를 보았다.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남양부 관아의 건물로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서기청(書記廳), 순교청(巡校廳), 별순교청(別巡校廳), 사용청(使傭廳) 등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동헌 앞쪽에 위치한 ‘와룡루’이다. 

『여지도서』 「남양」, ‘누정(樓亭)’에 “와룡루는 부 남문 위에 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 2층에 있었던 누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역명인 ‘남양(南陽)’이 중국의 유명한 정치가인 제갈량(諸葛亮)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남양부에서는 부내(府內)에 용백사(龍栢祠)라는 사우(祠宇)를 건립하여 제갈량을 배향하고, 관아의 남문에 해당하는 누각에도 ‘와룡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향토사학자 홍승길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14년 남양군이 수원군으로 통합되면서 일제에 의해 대부분의 남양부 관아가 훼손되었는데, 이때 시간과 위급사항을 알리는 싸이렌 대(臺)를 설치한다는 명분으로 와룡루도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누각에 걸려 있던 현판은 풍화당에서 수습하여 풍화당 정문의 후면에 게시하여 최근까지 보관되어 왔다고 한다.

 

화성시, 옛 남양부(南陽府) 관아(官衙)의 마지막 유물 기증.ⓒ경기타임스
<유물 기증식에서 와룡루 현판을 열람하는 화성시장과 풍화당기로회 임원진>

 

이번에 기증된 와룡루 현판 좌측에는 ‘신유년(辛酉年) 중하(仲夏)에 금릉옹(金陵翁)이 쓴다’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신유년이 언제인지, 금릉옹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어 앞으로의 연구가 요구되는 부분이다.

채인석 화성시장은 “서해안 시대를 맞이하여 삼국시대 당성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남양부가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지 100주년이 다가오는 시기에 남양부 관아의 마지막 유물인 와룡루 현판이 화성시에 기증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면서 유물을 기증해 주신 풍화당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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